2020년 10월 11일 -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레갑 자손처럼 남은 자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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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3 2020.10.0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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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듣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목자들이 레갑 족속입니다. 당시 레갑 족속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 5km 지점 언덕인 라못라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지명을 구약에는 벧학게렘이라 불렀는데 ‘포도원의 집’이란 뜻입니다. 레갑 족속이 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것은 B.C. 842년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예후 왕 때로 추정되며 레갑의 아들인 요나답은 아합이 죽고 예후왕조 때에 벧학게렘으로 이주하여 북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도 하나님의 특별 보호를 받으며 유일하게 남은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유언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남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렘 35:19). 그리고 그 후 유다 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에 모두 포로로 잡혀갈 때에도 “빈천한 자 곧 목자인 레갑 자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갑 자손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131년이 지난 포로 후 B.C. 455년에도 그곳에 살면서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할 때 “분문(똥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던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3:14). 레갑 족속의 기원은 아브라함의 후처가 낳은 미디안 족속으로 그 안에 겐 족속이 있습니다(대상 2:55). 모세의 장인도 미디안에 거주하는 겐 사람으로 그 자손이 가나안 정복 후 유다 자손과 함께 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삿 1:16).
그렇다면 레갑 자손은 어떻게 하나님께 칭찬과 인정과 보호와 구원을 받은 영광스러운 족속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왜 후손들에게 세 가지 계명인 집을 짓지 말며, 포도원과 밭을 소유하지 말고, 포도주를 금하라고 하였을까요? 단지 유언이라는 이유로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하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정당성이 없이는 조상의 유언을 800년을 넘게 지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요나답은 예후 혁명의 일등 공신입니다. 예후 개혁의 시초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아합은 시돈의 왕이자 아세라 신의 제사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 문화는 토지의 무한 축적이 가능했던 토지법이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로 흘러 들어왔는데, 이 토지법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각 지파 각 족속에게 토지를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토지법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예후는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합의 온 집을 멸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일에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 함께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후와 함께 개혁을 성공시킨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왜 집과 포도원과 포도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왕하 10:28-31)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후가 개혁으로 바알의 추종자들은 제거했으나 풍요와 쾌락을 향한 우상숭배는 백성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후 또한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여로보암처럼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나는 것이 두려웠을 뿐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남 유다로 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 언약 백성이 된 요나답은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회복을 꿈꾸었지만 예후에게 크게 실망하고 자신만이라도 바알을 섬기는 세상의 풍요와 포도주에 취하여 언약을 망각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언을 했고 하나님은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셔서 남은 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레갑 자손처럼 남은 자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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